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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점심식사

 

얼마 전 출장을 갔다가 일본의 도쿄(東京)미술구락부라는 유명한 미술감정단체에서 공식적인 방문을 할 기회가 있었다. 70세가 넘는 미술감정분야의 대가분들이 네 분이나 기다리고 계셨고 매우 진지한 대화가 오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11시부터 시작된 대담은 무려 3시간 반을 넘겨 2시 30분이 되었다. 예정된 시간은 기껏해야 1-2시간쯤으로 생각했지만 유익한 상호간의 대화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12시가 넘고 1시가 넘으면서 아침도 거른터라 너무나 배가 고팠다. 결례가 될 것을 염려하여 차마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내심 우리나라의 관례처럼 점심식사를 해결하면서 대화를 나누려니 하는 기대로 눈치만 살피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도무지 식사를 하자는 요청이 없었다. 다만 조금씩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녹차만 연신 바뀌며 배달되었다. 내색을 할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3시가 되어서는 다음 약속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일어서려는데 6개의 쇼핑백이 비서실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대표자는 그 중 두개를 우리에게 건네면서'가시면서 택시에서 드시지요, 죄송했습니다'라는 말을 곁들였다. 물론 정문까지 내려와 정중한 인사로 송별을 하면서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선물은 다름 아닌 샌드위치 2조각에 물 한 병이었다. 물론 자신들도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는 것으로 보였다.

돌아오는 차에서 그 '인상적인 점심식사'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담시간에 순간적으로 배가고프고, 다소 섭섭한 점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일본 방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식사나 그에 수반되는 이동으로 낭비될 수 있는 시간들을 줄이고 1분이라도 더 대화를 나누면서 실질적인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나에게도 매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중 세분은 미술품감정경력이 50년이 넘었다는 것이며, 일본에서도 최고봉에 이른 저명한 인사였다. 그렇다보니 우리로서도 배워야 할 점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물론 자료도 충분이 제공해주었고 어려운 감정서까지도 촬영을 허락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기에 상당한 수확이 있었다.

그 미술품 감정단체방문은 첫날 일정이었다. 이어서 다음날부터 연속되는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 등의 방문에서도 경우는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여러 번 있었다.

물론 이번 일본방문은 목적한 방문성과를 얻기도 했지만 형식만 화려한 외빈접대나 업무형식에 대하여 많은 자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원래 1990년대 최고의 경제성장기에 년 10조 정도로 추산되는 세계 최대의 미술시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최근 급속한 하락세를 면치 못하면서 세계무대에서 사라져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번 자료조사에서는 여전히 아시아시장과 세계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강세를 유지하면서도 탄탄한 자신들의 아트마켓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바로 그날 미술품감정단체서 볼 수 있던 원로 그룹들의 진중한 연구와 분석, 거래의 안전장치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우리미술시장이 반등세를 보이면서 예술품이 투자의 대상으로 급속히 부상하고 있다. 아트펀드도 생기고 경매회사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내실을 기하지 못하는 예술시장은 그 어떤 경우보다도 견고하지 못한 시장으로 전락할 위험을 지니고 있다. 㰡인상적인 점심식사㰡‘의 짤막한 기억을 되살리며,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2006. 10. 경희대학교 대학주보

 

파리의 묘지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시와 시작 2003년 가을호

 

영하쯤 되었을까....

  파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몽마르트의 언덕을 넘어서니 갑자기 그  추운 날씨에 첼로연주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처음 듣는 곡이지만 키가 훤칠하게 크고, 긴 수염에 남루한 코트차림이 한 눈에 짚시 연주가 였다. 코가 빨갛게 얼어있을 정도로 제법 추운 날씨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지긋이 눈을 감으면서 연주 삼매경에 몰입하고 있었다.

  동구권이나 러시아쯤에서 왔을까....

  유럽을 여행하면서 느낄 수 있는 행복, 바로 그것은 루브르 박물관이나 바티칸과 같은 거대한 문화유산들보다는 바로 그 짚시 청년과 같은 거리의 악사를 만나면서 잔잔한 감동이 삶의 가치를 읽을 수 있게 하면서 짜릿한 전율로 와 닿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의 본론은 묘지를 보는데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프랑스의 묘지는 세계적으로 연구대상이 될 만큼 실용적이고, 예술의 나라다운 진수를 엿볼 수 있다기에 필히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 짚시 연주가의 테잎을 하나 사 가지고 총총걸음으로 시내로 내려왔다.

  도착한 곳은 몽파르나스묘지였다. 그곳은 파리의 23개 묘지 중 페르 라셰즈, 몽마르트르 묘지와 함께 3대 묘지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우선 입구에서 묘지 안내도를 한 장 얻어들고 내부로 들어섰다. 그런데 몽파르나스의 첫인상은 어떠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들어선 것보다도 강렬하였다. 우선 묘지 곳곳에 보이는 크고 작은 조각품들이 마치 밀집된 조각공원에 들어온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도록 하였다. 우리가 생각했던 묘지라는 으스스한 기분보다는 각기 화려한 삶을 살다간 주검들의 채취를 가장 함축된 조각품으로 만난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 닿았다.

 멀지 않은 곳에 우선 사르트르와 보봐르 묘지가 눈에 띠었다.

 세계적인 저명인사의 묘지라고 보기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였다.  

 

Jean Paul Sartre

1905-1980

 

BEAUVOIR Simone

1908-1986

 

하나의 묘지에 두 사람의 이름이 위 아래로 새겨져 있었고, 한 일주일이나 되었을까.... 이미 커피 빛으로 변한 장미 꽃 몇 다발과 싱싱한 꽃 한 다발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인간은 자유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다.”라고 말했던 철학자 사르트르.

  아무런 장식도 없는 한 평 남짓한 미색 대리석 뒷면에는 담쟁이 흔적이 있는 수 십년은 되었을 법한 담벼락이 마치 그들이 살다간 파란의 시대, 세계를 놀라게 한 실험의 삶을 그대로 멈추게 한 듯 묘지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뜻밖에도 만 레이(1890-1976), 모파상 (1850-1893), 이오네스꼬 (1909-1994), 짜라 (1896-1963) 등을 만나게 되었다.

  한결같이 한 평 남짓한 같은 규격에 묘지의 설계와 장식은 각기 다르게 만들어져 있었다. 사진도 새겨 넣고, 고대 신전의 기둥을 본떠서 석물 위에 문을 하나 새우기도 하고, 건축물의 일부처럼 장식하거나 짜라처럼 그저 꽃으로만 장식하는 묘지들도 보였다.

  누구의 묘인지는 모르지만 손을 맞잡고 있는 거대한 브론즈상이 있고, 흐느끼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거나 석조작품과 본격적인 추상조각을 모뉴멘트로 세우고 가운데 망자의 얼굴을 조각한 묘지도 있었다. 그리고 전체 묘지는 다양한 색채의 꽃들과 함께 마치 정원의 편안함과 장식성이 묘지라는 느낌 이전에 야외 박물관 같은 인상으로 와 닿았다.

  한참을 거닐어 보니 언뜻 묘지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일생을 살았을까하는 추측이 가능할 정도로 각기 개성적인 조형물들이 상당수였다.

  이거야말로 망자의 미술관이었다.

 오죽해야 묘지를 찾는 관광객들 때문에‘파리의 묘지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할까.... 묘지 그 자체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서 죽어서도 예술적 영혼을 구가하는 그들의 사고가 진정으로 평가할 만 하였다.

  몽파르나스의 잔잔한 충격을 뒤로하고 다시 내친 김에 몽마르트묘지로 다시 건너갔다.

  그곳에서는 드가(1834-1917) , 하이네(1797-1856) , 니진스키(1889-1950 ) ,오펜바흐(1819-1880) , 에밀졸라(1840-1902) 등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안내도에 적힌 묘지 주소만으로는 내가 찾으려는 묘지를 쉽게 구별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후에 이해하게 되었지만 ‘1.2평의 평등’규칙에 의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면적을 제한하고, 가족공동의 화장이나 매장을 권장하는가 하면, 층층으로 매장을 하는 관습에 따라 가족묘의 이름으로 새겨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파스텔작가로 유명하며, 발레리나의 환상적인 모습을 즐겨 그린 드가의 묘소를 찾는데 애를 먹었던 것도 가족묘를 찾지 못해서였다.

 

 

  ‘FAMILLE de GAS’ 라고만 씌여진 묘안에서 겨우 드가를 찾을 수 있었다. 강렬한 자의식으로 인하여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그는 인간혐오증까지 품게되면서 외로운 노년으로 파리에서 1883년의 생애를 마쳤던 삶은 작품에서 보는 화려함과 환상적인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인생은 병이고 세계는 하나의 병원이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들의 의사인 것이다”라고 말했던 하이네의 묘지에서는 저명한 시인답게 어느 방문객이 써서 남긴 편지가 다섯 장이나 올려져 있었다. 독일출생이었던 그는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전통을 연결하는 서정시인인 동시에 반전통, 혁명적 저널리스트로서, "시인이 아닌 사람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이다"라는 베르네의 말과 같이 평생 고뇌와 절망, 고국 독일을 향한 그리움이 스며있는 듯 묘지위로 새겨진 그의 흉상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서서히 어둠이 깔려가는 묘지를 떠나려고 할 찰나였다. 멀리 아파트들의 불빛이 하나 둘씩 반짝이면서 문득 참으로 감동적인 곳에 서있다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수평으로 놓여진 묘지석 위에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간단하고도 명료한 곡선의 추상적 브로즈상이 눈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아도 브랑쿠지의 조각이었다. 20세기 조각계의 거장으로서 아프리카나 원시조각의 형태를 현대조각에 접목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작업으로 각광을 받았던 작가이다. 평소 존경하던 작가일 뿐 아니라 그 묘지에 올려진 작품이 이미 전날 봉피두센터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들 중 한 점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숨을 죽이고 가까이 다가가서 과연 브랑쿠지의 작품인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미 날은 어두워져 그의 사인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브랑쿠지의 경향이 뚜렷하게 보이는 간결한 곡선과 원시적 형태의 긴장감이 있었다. 만일 그의 작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영향을 받은 역량있는 작가의 작품일 가능성은 확실하였다.

  공동묘지에서 만나는 세계적인 조각가의 작품이라니...

  

  파리에는 이외에도 페르 라셰즈묘지에 프레데리크 쇼팽과 발작, 뒤뷔페, 오스카 와일드, 짐 모리슨, 이사도라 덩컨, 이브 몽땅 등을 비롯하여 10만개의 묘소에 몇 개 층으로, 혹은 화장된 아파트묘지형태로 50만 명이 잠들어있다.

  이미 1776년 국왕의 묘지정비선언이후 다양한 제도적 장치로 인하여 지금도 국토의 0.1% 이내에 머물고 있다는 프랑스의 묘지는 수많은 조각품들이 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유명인사들의 묘지를 여러 곳으로 옮기도록 함으로서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더하여 기간을 정하여 제한된  2m×80cm, 즉  1.2평의 묘지는 수직으로는 얼마든지 조형물을 세우거나 장식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도 예술적인 묘지규칙을 만들기도 하였다.

  년간 14만 명의 참배객이 다녀간다는 드골 전 대통령은 '콜롱베 레 두제그리제'의 공동묘지에 묻혔고, 미테랑 대통령 역시 프랑스 남서부의 시골마을 자르낙의 공동묘지에 누워있다.

  이러한 점들은‘사후에도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는 기본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며,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언제나 시내의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보니 그 수많은 묘석 위에 놓여진 꽃다발과 깔끔하게 가꾸어진 화단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풀리는 듯 하였다.

  마치 동네의 공원처럼 거주지 가까운 곳에 있는 묘지를 한 달에 한 두 번씩 찾아 성묘하고 정성껏 관리하는 습관을 가진 프랑스사람들의 철저한 관리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 식의 성묘라는 말보다는 대화를 하기 위하여 찾는다는 말이 더 가까운 표현일지 모르겠다.

 

  다음날  내친김에 평소 그리던 반 고흐의 묘지를 찾아 나섰다. 오베르 쉬르와즈는 교외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용하고도 아늑한 느낌이 감도는 오베르에 당도하자마자 나는 고흐의 묘지부터 들렀다.

  그러나 고흐는 파리에서 보았던 묘지들 보다 훨씬 초라했다. 이끼가 오른 돌 위에

 

Vincent van Gogh

1853-1890

라고 씌여진 글씨가 선명히 고흐의 무덤인 것을 표시하였을 뿐 그 어디에도 세계적인 화가로서의 거창한 수식은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옆의 묘석에는 없는 비닐에 쌓인 두 다발의 꽃이 놓여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평생 그의 동지였던 동생 테오가 오른쪽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웬지 눈시울이 젖어오는 감동이 올라왔다.

 

Theodore van Gogh

1857-1891

 

 

  1890년 7월 29일 권총 자살로 그는 죽었던 그의 비극을 따라 테오는 결국 1년 뒤인 1891년에 그토록 좋아하던 형 고흐의 옆에 묻혔던 것이다.

  오베르에서 70일 동안 70점의 작업을 하였고,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광기에 휘말려, 폭풍과 고통의 드라마로 일관했던 고흐는 죽으면서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동행한 파리작가 고병진 군이 나에게 말하였다.

  “힘겨울 때나 고국이 생각나면 이곳을 찾게되지, 웬지 여기에 오면 마음이 가라앉아...”

 

  우리의 정신적 스승들은 어디에 있는가?

  미아리에 안장되었다가 유실된 이상의 묘, 미국에 묻혀있는 김환기, 프랑스에 묻힌 이응노, 독일에서 귀국하지 못한 윤이상, 망우리에 있는 오세창, 한용운, 박인환, 양구에 있는 박수근, 청주의 김기창 모두가 흩어져 있는 우리들의 스승들, 작업이나 삶이 힘겹고 벼랑에 부딪힐 때 찾고싶은 그들의 흔적이 우리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너무나 멀리 있다.

  설혹 있다하여도 다듬어지고, 인공적으로 장식되어져서 그들의 자취를 찾기에는 너무나도 낮설게만 느껴진다. 관광지로 변해버리면서 옛 흔적들이 완전히 인공적으로 변신해 가는 우리의 유적관리도 참으로 한심하지만 그들의 흔적을 기리고, 보존해 가는 자세를 갖지 못한 우리의 현실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전국에 그나마 보존되었다는 생가를 가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목조건축의 한계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문제도 이해는 되지만 전혀 당시의 손때가 묻지 않은 건물들이나 주변 환경은 문화적 보존이나 계승과는 거리가 멀다.

  복원하지 않는 콜롯세움이나 그리스의 신전들이 갖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헐고, 남루하지만 그 시대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어떠한 인위적 행위도 절제하면서 이를 보존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그들이다.

  감동과 미학이 있는 묘지.

  굳이 예술인이 아닌 보통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공공미술관으로서의 묘지, 프랑스 렌느 처럼 음악회나 공연을 기획할 정도의 문화유산으로 남는 죽은 자를 위한 진정한 배려가 있는 정도라면 누구나 그곳에 안장되기를 원할 것이다. 화장문화를 서둘러야 하는 우리의 경우 풍수지리 등 동양적 정서를 뛰어넘어 해결해 가야 할 우리들의 또 다른 문화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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